서우당/작가의 작법서

김연수 <소설가의 일> 밑줄긋기

쓰는 탐험가 2026. 6. 2. 16:35

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떤 것이다. 그 내용이 뭐든, 내가 이해하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든, 그는 뭔가를 썼고, 그의 시간은 11권의 책으로 남았다. 소설가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12쪽

에드거 월러스 - 서른 살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해 이십칠 년간 170권이 넘는 장편소설을 남긴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 전집 - 문예춘추에서 모두 66권 출간. '실제로는 선집'이라는 주석. 

1898년 영문학과 신입생 당시 저자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기 시작. 그게 시작. 그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을 썼음. 

일생이 전집, '실제로는 선집' 66권으로 남게 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소설가겠지. 결국 비밀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달린 셈이다. 14쪽

자영업자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당분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 그러니까 매일 일하는 삶이다. 16쪽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모두 똑같은 풍경이라 그게 더 무섭고 절망스럽던 몽솔의 평원에서 나는 그 소년을 붙잡고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 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민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나면 그건 도무지 내가 쓴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사람, 즉 신인이 됐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18쪽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단편)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인사기계나 기도기계 같은 것. 그러니까 마치 나 대신에 소설을 써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기계 같은 것이다. 재능이라는 소설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기계 역시 소설가의 죄책감이나 꺼리칙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다. 스스로 자신을 소설기계로 만들어보기 바란다. 23쪽

<북회귀선> 헨리 밀러 11계명
1. 한 번에 하나씩 일해서 끝까지 쓰라.
2.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검은 봄>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마라.
3. 안달복달하지 마라. 지금 손에 잡은 게 무엇이든 침착하게. 기쁘게. 저돌적으로 일하라.
4.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계획에 따라서 작업하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만 써라!
5. 새로 뭘 만들지 못할 때도 일은 할 수 있다. 
6.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7. 늘 인간답게!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곳에 다니고, 내킨다면 술도 마셔라.
8. 짐수레 말이 되지 말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져야 한다.
9. 그러고 싶다면 계획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다시 계획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몰입하라. 점점 좁혀라. 거부하라.
10. 쓸고 싶은 책들을 잊어라. 지금 쓰고 있는 책만을 생각하라.
11. 언제나 메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다음에.

작가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이는 힘의 원천을 안다. 28쪽

내가 생각하는 젊은 소설가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는 스물네 시간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한 가지 생각만 할 것이다. 문장들, 더 많은 문장들을. 

글을 쓰려면 초고를 써야만 하는데, 초고를 쓰면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이게 창작의 딜레마다. 34쪽

내가 찾아내려고 하는 건 디테일이다. 우리말로는 세부묘사라고 하는데,소설에서는 세부 정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소설의 문장이라는 건 이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다. 그러나 소설가가 시놉시스를 쓰거나 줄거리 요약을 하거나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면, 원칙적으로 소설을 쓰는 게 아닌 셈이다. 처음 소설으 ㄹ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것들이 서로 구분도 되지 않고, 세부 정보를 알아내는 일이 너무나 성가시기 때문에 흐리멍덩한 문장을 피할 수 없었다. 소설은 논픽션과 달리 작가가 자신이 쓰려는 세계를 먼저 상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6쪽

생고생(하는 이야기)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시랑하는 지 말해준다는 걸 문학이론에서는 '성격적 결함'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대개 장점과 장점은 같은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46쪽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54쪽

세상에는 헤밍웨이처럼 하드보일드 형의 소설가도 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자멸파 형의 소설가도 있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황희 정승 스타일의 소설가다. 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건 단순히 선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작법의 문제다.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이해 없이 소설가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 

왜?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백스토리가 된다. 어떻게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디테일이 된다. 이 디테일은 플롯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갖추면, 그 어떤 인물도 악한이 될 수 없다. 60쪽

"왜 하필이면!"과 "설마 그럴 줄이야!"는 세계적인 고전들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고등기법이다. 

더 구체적으로 알수록 우리는 더 빨리 사랑에 빠진다. 독자가 감정이입하는 대상은 다른 등장인물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보여주는 쪽이다. 더 구체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는 경험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경험과 닮아 있다. 71쪽.

캐릭터는 이미 만들어졌다. 단지 우리엑 감정이입할 시간과 노력이 없을 뿐이다. 

문장만은 제일 먼저 쓴 문장이 제일 안 좋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 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기가 바로 소설가의 주된 일이다. 자기가 쓴 초고를 보면 누구나 약간의 구토 증세를 느끼는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 75쪽

손볼 문장이 있을 때에만 소설가는 생각한다. 그 외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직관의 힘을 믿을 뿐, 소설가들은 생각 같은 거 잘 하지 않는다. 

소설과 비소설의 차이는 이 핍진성에 있다. 소설에서 진실이란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를 뜻한다.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일관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핍진성은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다.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84쪽.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 릴

2부. 플롯과 캐릭터

 

내 경험으로 창작의 대략 팔십 퍼센트는 '아, 잘못 썻구나'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 아닌데도 어쨌거나 계속간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해서 내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하지만 의도했던 것보다 훨썬 더 대담하고도 훌륭한 소설을 쓴 적이 몇 번 있따. 이 지경이 되고 보면, 도대체 실패란 무엇이고 성공이란 무엇인가는 생각마저 든다. 89쪽

폴 오스터가 말했듯이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작법에서는 에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이런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라고 부른다.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3막 구조인 셈이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분이 지날 무렵에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두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따.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서사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차아내 이야기를 3 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번 더 산다.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92쪽

캐릭터 중심의 소설은 내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느리며, 플롯 중심의 소설은 외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빠르다. 

모든 플롯은 어떤 행동/액션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뭔가를 할 때 일어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구경

소설으 ㄹ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터고 토하기 직전까지 참고 쓰는 원고)

소설가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으 ㄹ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장편 소설을 쓸 때, 플롯과 관련해서 경험하는 가장 신비한 일은 완벽한 플롯을 짜면 짤수록 그 소설을 끝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우리는 플롯을 짤 수 있다. 110쪽

교정쇄를 모두 넘기고 책이 나올 때까지의 짧은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책이 나오면 슬슬 새 일을 시작해야겠지만, 나오기 전까지는 괜찮다. 그냥 막 빈둥거려도 된다. 

소설의 문장 역시 옷과 같은 일을 한다. 처음에는 날것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쓰여진다. 욕망의 문장을 써보자. 114쪽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욕망이 절대로 문장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멋진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좋은 소설이라면 욕망을 감추는 그 문장 자체가 이처럼 기발하고 멋져야 한다.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그 욕망을 가리기 위해 짐짓 하는 말들이 바로 문학의 말들이다. 캐릭터가 자기 속마음만 말하지 않아도 그는 어느 정도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 된다. 

소원을 이루려면 사십 년은 한결같이 원해야 하는가보오. 움베르트 에코

뇌과학에는 반복된 경험이 뇌의 구조를 바꾼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신경가소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반복하면 할수록 뇌의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어떤 일을 계속 연습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일단 뇌가 바뀌면 사람이 달라진다. 119쪽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과 표점과 몸짓이 바로 그의 세계관이다. 생고생의 결과 주인공의 변화는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비극이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끝나는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지, 비관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반드시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생의 묘미를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성격의 형성이다. 122쪽

말은 그 사람의 속내를 감춘다, 이게 중요하다. 속내는 가치관, 욕망, 감정이다. 말이란 늘 캐릭터의 욕망을 배반하는 원치 않은 부산물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자주 서로를 오해하는데, 그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진짜 욕망이 아니라 가짜 욕망을 서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고 백날 말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말은 그 속성상 관계 속에서 속내를 왜곡한다. 진짜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다면 '표정, 몸짓,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128쪽 

문학적 표현이란 진부한 말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걸 뜻한다. 결국 문학이란 남들과 다른,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걸 뜻하니까. 욕망의 말들은 꽤 진부한 편에 속한다. 욕망의 말들이 진부한 건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원하는 것은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뜨거운 내용도 담을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합되지 않은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되,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는 표현을 찾아낸다면 금상첨화다. 소설은 이 세상에 유일한 한 사람을 다루는 일이니 그보다 더 들어가야만 한다. 결국 소설의 대사란 진부한 욕망의 말들을 은폐하기 위해 참신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하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2차적인 목표가 있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두번째 목표가 소설가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핍진성이란 소설 속의 세계가 긴밀하게 짜여 있어서 현실과 무관하게 나름대로 독립적인 세계를 이루는 성질을 뜻하니까. 그러므로 핍진한 소설이라면 캐릭터들은 진부한 날것의 말들을 자신들의 백스토리와 가치관과 욕망에 걸맞은, 참신한 표현으로 끊임없이 바꿀 것이다. 여기까지는 왜 소설 속의 캐릭터들은 우리처럼 말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겠다. 여기까지 읽으면 현실의 우리는 그다지 핍진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132쪽 

소설가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을 지녔든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변화의 이야기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주인공의 변화를 다룰 때, 결말 부분에는 반드시 그 변화를 확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쓴다는 동사일 뿐. 잘 쓴다도 못 쓴다도 결국에는 같은 동사일 뿐. 잘 못 쓴다고 하더라도 쓰는 한 그는 소설가입니다. 144쪽

소설가는 세상만사를 비틀고 뒤집어서 보는 사람. 뭔가 심사가 꼬여 대세에 순응하지 않고 자꾸만 인생의 어둡고 습하고 음침한 구석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거기야 말로 내가 찾는 인생의 빛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이야기'라고 말하겠다. 마찬가지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못 쓰고 못 쓰고 못쓰기를 간절하게 원해야만 할 것이다. 

생고생 = 절망. 이런 느낌이나 기분이 소설에서는 너무나 중요하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소설 속의 모든 주인공들은 오로지 이런 느낌이나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신이 절망한다는 사실을 감추기위해서 대화한다..(농담, 괜찮다고 말함) 현실의 삶에서는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하지만, 소설에서는 감추기 위해서 말한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절망한다는 사실을 표정 및 몸짓과 행동으로 보여준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절망의 표정 및 몸짓, 그리고 절망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히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다.  147쪽

좌절과 절망이 소설에서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이 감정은 이렇게 사람을 어떤 행동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예술은 절망 속에서 꽃핀다는 말이 있는데, 좌절과 절망이 선사하는 이 거대한 생산력을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 밑바닥에서 빠져나온다. 그런데 소설은 감동수기 같은 게 아니니까 빠져나오는 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그에게 타지마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남들과 다른, 진부하지 않은 독특한 이야기를 쓰겠다면, 전락의 이야기보다 회복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152쪽

<캐빈에 대하여> 사이코패스는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그런 마음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팜을 참관하면서 놀란 것은 악행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에 비하면 그 일을 행한 자의 정신적 수준은 너무나 천박하다는 점이었다. 악행의 이유는 그렇게 짧거나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니까 캐빈이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 건 너무나 사실적이다. 이렇게 이유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들도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좀 높아야만 한다. 세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행하려면 좀더 배워야만 한다. 한나 아렌트가 배운 바에 따르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천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악행이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기나긴 과정이 필요하다.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도 사유하려고 한다. 나는 그런 하찮은 인간들돠 나무지 인류가 동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테니까. 156쪽

악행의 이야기만으로는 우리가 어떤 깊도 담을 수 없다는 사실. 우리가 사이코패스와 시선을 안 마주치려는 이유는 그자가 우리의 심연을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없이 저열하고 하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이야기는 천차만별이라 서사적으로 더 우월하다. 선(사랑)의 이야기는 모두가 오리지널이다. 159쪽

소설을 쓰는 작가는 독자가 자신의 주인공에 더 깊이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만 한다.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알려줘서 독자가 주인공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다. 주인공을 거듭해서 좌절시켜 독자가 그를 걱정하게 만든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니체

3부. 문장과 시점

내가 지금 말하는 게 문체와 유사하긴 하지만, 문체만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한 작가가 쓰는 모든 글에 남는, 그만의 확실한 서명이다. 한 작가는 바로 이것 때문에 다른 작가와 구별된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시각을 아름답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우리 주위에는 그런 작가가 남을 것이다. - 레이먼드 커버

주인공에 감정이입된 소설가라면, 그러니까 주인공을 사랑하는 소설가라면 구체적인 단어와 낯설지만 창의적인 표현과 색다르나 생생한 경험들로 자신의 문장을 채우려 할 것이다. 세심하게 관찰을 잘 하면 누구나 다 미문을 쓸 수 있다. 소설에서는 흔한 일을 흔치 않게 쓸 때 미문이 된다.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174쪽

미문이 인생.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찹해진다.

가명으로 소설 쓰기: 김해경, 줄리언 반스, 폴 오스터(폴 벤저민), 스티븐 킹, 로맹 갈. 반스(댄 캐버나)와 오스터는 본명으로는 진지한 소설, 가명으로는 대중적인 문체로 추리소설을 썼다. 

숨은 단어들을 더 많이 쓰면서 캐릭터가 생생해진다는 사실을 발견. 구체적인 단어는 소설의 주제를 심화시킨다. 

소설을 잘 쓰려면 말을 잘해야 한다. 본인이 만족할 정도로 충분히 많이 한다는 뜻이다. 훌륭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소설가는 워낙에 양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남들보다 많으므로 기회가 닿는 한, 말의 질을 따지기 전에 일단 밀린 말부터 빨리 쏟아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을 쓰느라 열심히 조사했는데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버리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소설을 계속 쓰면 쓸수록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등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 그 자체가 중요하지, 내용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는 걸 점점 깨닫게 된다. 188쪽 디자인 멋지음이 여러 번 소설을 쓴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는 문장만을 쓰는 사람에 가깝다.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 

소설가는 내용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다. 문장을 고치는 사람이다. 

소설 쓰기 전에 하는 생각들은 실제 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소설은 문장이다. 실제 문자로 써보기 전까지는 어떤 구상이나 생각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쓰고 나서 생각하자. 199쪽

소설을 쓸 때는 무엇을 아는지 아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 한 명의 독자가 있는 한, 소설은 미래에 읽힌다는 걸. 쓰는 시점과 읽는 시점 사이가 벌어질수록 작품을 누르는 시간의 압력은 점점 커진다.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미래에도 읽힐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203

문장을 손 볼 때 서술어 부분을 최대한 줄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명사처럼 쓴 동사를 정리한다. 예를 들면 '하다'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는다. '생각을 하다' - 생각하다 . 선물한 것이다, 선물하였다, 선물해줬다, 선물해봤다 - 선물했다.

소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문장을 쓰는 일이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 

소설가는 소설 쓰는 일 외에 애시당초 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시간관리를 한다. 

소설가에게 혁신이란 이전에는 쓰지 못한 문장을 쓰는 일. 감각해서 알아낸 단어와 표현으로 원고를 쓰고, 그 원고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로운 단어와 표현으로 교정한다. 아는 사람은 쓰지 못하고, 쓰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느끼려고 할 뿐

소설가의 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리게 글 쓰는 일" 한 권의 책을 펴내고 나면 머릿속은 곧 과묵해진다. 자신의 경험으로 쓸 수 있는 소설은 한 권뿐.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문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한 줄도 못 쓴다.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세 시간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글을 쓴다. 세 시간이 지나면 읽고 쓰던 걸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소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느리게 쓴다는 것은 문장을 공들여 쓰고 플롯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구성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230-233쪽

소설을 소설 속 주인공의 시점안에서만 쓰는 일을 피하면 된다. 글쓴이가 일인칭 주인공과 완벽하게 일치해서 글을 쓰는 걸 굳이 장르로 표현하자면 '일기'가 아닐까. 혼자 읽기 위해서혼자 쓰는 모든 글 = 일기. 

소설을 쓰다 보면 소설이 나를 쓴다는 느낌이 들 때도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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