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신인상을 타고 3년 동안 잠적한다. 37세 촉망받는 소설가였던 하루키는 갑자기 일본을 떠나서 그리스와 이탈리아, 영국에서 3년을 살았다. 그 때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썼다. 정면 승부를 벌이겠다는 작가의 결의가 느껴진다. 하루키 평생에 걸친 테마라 할 만한 상실감이 가장 생생하게 담긴 작품들이가. 뭔가 삶에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놓치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복 불가항력적이어서 비통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막막함. 그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포착. 그래도 남은 것들을 최대한 지켜보려는 의지.(<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144쪽)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일 유명한 일본 작가라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총 12회로 나뉜다. 2015년에 집필했고 하루키는 5~6년에 걸쳐 원고를 썼다. 강연 원고를 쓴다는 생각으로 문장을 바꿨다. 전반부(1~6장)는 잡지 <Monkey>에 연재되었다.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좋게 말하면 일관된)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십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으로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334쪽)
하루키는 문학계와 연고도 없고 그냥 어느날 문득 소설이 쓰고 싶어 썼는데, 마침 그 소설이 문예지 <군조>의 신인상을 타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래서 홀로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해서 성공한 경우다. 하루키가 성공한 소설가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꾸준하게 소설을 쓰는 것이다. 소설을 한두 편 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16쪽) 이십 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인 소설가로 활약하고, 살아 남아서 각자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르게 강한 핵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려도 무방할 것이다. (28족)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작품이 적어도 연대기적인 '실제 사례'로 남겨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 즉 납득할 만한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쌓아 올려 의미 있는 몸집을 만들고 자기 나름의 작품 계역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100쪽)
무라카미 하루키(1945~)
1974~1981 재즈 카페 운영 (고쿠분지 역 남쪽 출구 근처 가게)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80년 <1973년의 핀볼>
1982년 <양을 둘러싼 모험> - 전업 작가 시작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미국으로 진출 (40대)
1987년 <노르웨이의 숲>
1988년 <댄스 댄스 댄스>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초빙
1992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994년 <태엽 감는 새>
1999년 <스푸트니크의 연인>
2002년 <해변의 카프카> - 미국 베스트세럴 목록
2004년 <어둠의 저편>
2009년 <1Q84>
2013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의 야구장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1978년 4월 진구 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 "난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45쪽) 그것을 일종의 계시(epiphany)였다. 그 일로 그의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뀌어 버렸다. 시합이 끝나고 하루키는 서점에 가서 원고지와 만년필을 샀다. 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키친 테이블 작가의 시작이었다.
대략 반년 만에 소설을 쓰고 신인상을 탔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200자 원고지 400매 남짓이다. 그는 책 읽기를 워낙 좋아했지만 주로 19세기 러시아 소설이나 영어 페이퍼백만 읽었지 일본 현대 소설은 잘 읽지 않았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그만의 문체로 썼다. 영어로 쓰고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문장 리듬을 만들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저자이기에 그의 글과 음악은 유사점이 있다. 역시 좋아하는 것에 영감을 받기 마련이다. 첫 소설을 쓰면서 하루키는 뭔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완전히 채워졌었다. 뜻하지 않게 신인상을 타면서 그의 소설가 인생이 시작되었다.
소설가가 되려면 어떤 훈련이나 습관이 필요할까?
하루키는 3가지를 꼽는다.
첫째, 책을 많이 읽을 것.
둘째, 관찰하는 습관을 기를 것.
셋째, 어떤 일의 결론을 즉각 내리지 않기.
지속적 창조성도 개발해야 한다. 소재가 특별하지 않다면 시점을 바꾸거나, 발상을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 루틴
책상을 정리한다.
초고 - 매일 원고지 20매를 쓴다. 3600매를 쓰려면 6개월이 걸린다.
일주일 쉰다
첫 번째 고쳐쓰기
일주일 쉬기
두 번째 고쳐쓰기(한두달) - 꼼꼼하게 고치기, 풍경 묘사 세밀하게 고치기. 말투 조정하기
일주일 쉬기
세 번째 고쳐쓰기(수정작업)
한 달 쉭
네 번째 고쳐쓰기
제삼자에게 보여주기
다섯 번째 고쳐쓰기
출판사 편집자에 보내기
소설을 다섯 번이나 고쳐쓰는지는 몰랐다. 장편소설을 쓰고 나면 작가 대부분은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소설 같은 건 일단 쓸 리가 업식 때문이다. (162쪽) 그럼에도 조언이나 충고는 귀 담아 들어야 한다.
한편의 소설을 스고 나면 하루키는 '할만큼은 했다'라는 실감이 든다고 한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마음은 일절 없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쓴 시점에는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을 뿐이다.(170쪽)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라서 글쓰기 작업에 대해 말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나 자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32쪽)
하루키는 천상 작가다. 한번도 글이 안써져서 고생한 적도 없고 뭔가 써내는 것이 고통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글쓰는 것이 '기분 좋은 즐거움' 뿐이다. 항상 소설을 쓸 때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후회한 적도 없다. 하루키는 참 바른생활 사나이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채우고 낮잠을 잔 뒤 항상 한 시간 정도 뛴다. 바깥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라 집에만 있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외국에 나간다고 한다. 특히 청탁 원고를 안 쓴다고 한다. 그저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이나 에세이만 쓴다. 나도 기본적으로 모든 작가들이 하루키처럼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주변의 작가들을 보면 청탁을 받아야 더 잘 써진다는 작가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놀랍다. 쓰고 싶은 내용, 쓰고 싶을 때 쓰기 때문에 하루키의 직업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것 같다. 내가 지향하는 작가상이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키와 샐린저가 닮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으 ㄴ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다.(104쪽)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다.(105쪽)'
하루키는 '언젠가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대략적인 이미지가 그 안에 있다고 한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 - 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이다. 그게 잘되면 그런 작용을 독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딱히 구체적으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망므도 그때 그러한 자기 정화 작용을 본능적으로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260쪽)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쓸 때 자신만의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다고 한다. 가령 등장 인물에 이름 붙이기, 삼인칭으로 쓰자, 문체를 바꿔보자 등등.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253쪽)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극히 단순하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서설을 썼습니다. 그래서 별 욕심도 없었고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제약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문학계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존경하고 모델로 삼을 만한 선배 작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의 본모습을 비춰내는 내 나름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런 속직한 충동을 몸속에서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턱대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글을 쓰는게 즐거웠고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내추럴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9쪽)
하루키는 문학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는 오로지 독자의 선택을 중요시 여긴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73쪽)'라고 대답하곤 했다. 후세에 남는 것은 작품이지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책무는 조금이라도 질 좋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80쪽) 저자와 독자가 개인적으로 직거래를 하는 관계다.(283쪽)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번에 나온 신간을 읽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책은 꼭 살 거예요. 열심히 해주세요."라고 말해주는 독자다.(284쪽)
만일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딱히 주목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게 지극히 당연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334쪽)
하루키는 글을 쓸 때 자신이 가장 즐거운가를 묻는다. 만약 답이 예라면 당신은 작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써는 작가가 되어야 진정한 작가인 것이다.
상상력이란 기억이다. (제임스 조이스)